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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정치

백년전쟁 보고서, 두 얼굴의 이승만. 문서본 - 민족문제연구소

by InvestorX 2012. 12. 27.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행한 '백년전쟁 보고서'
가 유튜브에서 압도적인 조회수를 기록하고 트위터, 페이스북 등에서 반응이 좋다고 한다. 수많은 책 발행과 역사 알리기 운동보다도 훨씬 더 효과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 듯 하다.


백년전쟁 보고서는 우리나라의의 흥선대원군 집권 이후 일본의 운요 호 사건을 계기로 시작된 1900년대 부터  2013년을 바라보고 있는 지금까지의 약 100여년 역사를 재구성하여 조금은 다른 시각으로 풀이해보고자 만든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다큐멘터리를 만들게 되었을까? 추측해보건대,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이야기라는 말도 있듯이 지금 우리의 현재와 미래는 과거의 역사에 발목이 잡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를 장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보수우익과 종북좌파의 대결이라고까지 불리는 이 황당무계한 싸움은 사실 과거에 대한 청산을 제대로 끝내지 못했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누가 보수우익인가? 누가 종북좌파인가? 역사는 바로 보라고 하였다. 세계가 우리를 알지만 우리 자신은 정작 우리의 과거 역사에 대해 잘못 알고있는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 동안 이 동영상을 주변인에게 권하였으나 동영상으로 보기 힘든 사람들에게 동영상의 내용을 직접 옮겨서 글로 볼 수 있게 하려한다.


아래는 동영상과 그 내용 전문이다. 부디 많은 사람들이 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치 독일의 선전장관 요제프 괴벨스(Joseph Goebbels), 대중 선동의 천재였던 괴벨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어떤 나라에 쳐들어가면 그 나라 국민은 자동적으로 세 부류로 나뉜다. 한쪽에는 Resistance(저항세력), 다른 쪽에는 Collaborator(협력세력)들이 있고 그 사이에 머뭇거리는 Masses(대중)이 있다. 

그 나라 국민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온갖 부가 약탈되는 것을 참고 견디게 하려면 머뭇거리는 다중을 레지스탕스 무리에 가담하지 않고 콜라보들 편에 서도록 설득해야 한다." - 요제프 괴벨스


일본이 침략하자 조선에서도 똑같은 현상이 나타났다. 한쪽에는 독립운동가들, 반대쪽엔 친일민족반역자들이 있었고 그 사이에 대다수 민중들이 있었다. 

일본은 민중들이 친일파들 편에 서도록 치밀한 작전을 벌였다. 그 핵심이 바로 '식민지 근대화론' 이었다.
 


"일본이 낡은 조선을 발전시킨다." 

이 얘기를 반복적으로 선전해서 일본의 식민지배를 순순히 받아들이게 만들려고 했다. 

그러면서 일본은 친일파를 앞세워 땅과 쌀을 빼앗고 이름과 말도 빼았았다. 심지어 전쟁에 동원해 생명까지 빼앗았다. 




이에 맞서 독립운동 세력은 해외로 나가 임시정부를 세우고 독립군을 조직했다. 자신이 태어난 땅과 자기 민족을 지키고 싶었던 한국의 레지스탕스들. 그들은 독립을 대치하자 새로운 나라를 세우겠다는 꿈을 꾸며 필사적으로 싸웠다.


그러나 일제 콜라보 친일파들은 천황의 신민으로 사는 것이 조선 민족의 운명이라며 독립군들을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비웃었다. 


이들 중에는 혈서까지 써서 기어코 일본군이 된 자(박정희)도 있었고 심지어 독립군을 잡아죽이는 일에 직접 나서기도 했다. 이것이 독립군 토벌을 위한 친일파 특수부대, 간도특설대였다.




그렇기 때문에 독립군들은 일제보다 친일파들을 더 증오하고 경멸했다. 그래서 친일파들을 암살하기 위해 비밀조직(의열단)을 결성하기도 했다. 한국의 레지스탕스와 일제 콜라보들 두 세력의 길고 긴 전쟁은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일본 패전>,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자 상황은 완전히 역전됐다. 일본군은 철수를 준비하고, 기세등등했던 친일파들은 겁에 질려 숨어버렸다. 그러나 이미 강대국들은 은밀히 거래를 끝냈다. 2차대전에서 승리한 미국과 소련, 두 나라는 한반도를 분할하기로 결정했다. 38선 이북은 소련이 이남은 미국이 점령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1945년 9월 8일, 미군이 서울에 들어왔다. 
그러자 한국인들은 또다시 세 부류로 나뉘었다. 한쪽에는 자주적인 통일국가를 세우려는 독립운동 세력, 반대쪽엔 살아남기 위해 미국에 절대복종하는 친일파들. 그리고 그 사이에 혼란에 빠진 대다수 민중들이 있었다. 

미 군정은 자신들의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히 치밀한 작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숨어있던 친일 경찰과 관리들을 즉각 복귀시켰다. 그리곤 친일파들을 앞세워 자주독립 세력을 짓밝기 시작했다. 그러자 국내에서 건국을 준비하던 독립운동가들은 크게 당황했다. 그들은 해외독립운동 세력이 돌아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렸다.

1945년 10월, 드디어 미국에 있던 이승만이 귀국했다. 이어서 백범 김구가 상해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국내로 들어왔다. 공전이 불가능한 레지스탕스와 콜라보, 이제 그들의 결전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 중요한 순간에 국내독립운동가들이 기대를 걸었던 지도자는 임시정부의 수장 김구가 아니었다. 프린스턴 박사 학위를 가진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 이승만이었다. 결전을 앞둔 독립운동세력의 기대주 이승만. 그의 얼굴엔 두려움이 전혀 없다.

그는 아주 활짝 웃으면서 말한다.

 "나를 따르시오, 덮어놓고 뭉칩시다."

그런데 과연 이승만은 믿고 따를만한 지도자일까? 만약 아니라면 독립운동세력은 정말 위험해진다.
비밀이 해제된 미국 CIA 의 문서. 이 문서에 이승만의 인격이라는 파일이 존재한다. 여기에 충격적힌 얘기가 젹혀 있다.



"이승만은 사적인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 독립운동을 했다. 
이 목적을 추구하면서 그는 자신의 출세를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 미국 CIA 문서

만약 이게 진실이라면 독립운동세력은 물론이고 한반도의 운명이 위험하다. 
이승만, 그는 정말 출세밖에 모르는 사이비 독립운동가일까? 아니면 CIA 가 잘못 판단한 걸까?





< PART 1 당신이 알지 못했던 이승만의 모든 것 >

서중석 교수 <성균관대 사학과> 인터뷰
"이승만 얘기를 어디서부터 꺼내야 할 지 모르겠는데.. 이승만 그분한테.. 초기사상, 개화사상을 가르쳐 준 분들은 선교사였습니다. 미국 선교사.. 그 미국 선교사를 통해서 미국이 얼마나 강한 나라, 힘있는 나라라는 것을 배웠더랬어요.."


몰락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이승만. 그는 아주 일찍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이 선택은 그에게 엄청난 행운을 가져다주었다. 

그 당시의 미국 기독교계는 조선에 기독교를 널리 전파시켜 줄 조선인 목사가 절실히 필요했다. 이 사실을 잘 아는 이승만은 목회자가 되겠다는 서약을 하고 조지 워싱턴 대학에 특별생으로 편입되는 특혜를 받았다.
 
그리고 대학을 마치자 이승만은 박사 학위 취득을 목표로 하버드에 들어갔다.


주진오 교수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인터뷰
"하버드를 갔는데 거기서 결국은 석사를 마치지 못했어요.. 
가서 도저히 학업을 따라갈 수 없었겠죠. 그러니까 학교를 그 다음에 프린스턴으로 옮기는데.."



이 과정에서도 미국 장로교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석사 학위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 박사과정에 입학했고 게다가 2년 내 박사학위를 준다는 파격적인 보장까지 받았다.

주진오 교수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인터뷰
"그는 미국사람들과 딜을 할 줄 알았어요. 보통 사람이라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거를 하나 하죠. 
그게 뭐냐면 하버드에 편지 하나를 보냅니다. 내가 프린스턴에서 박사학위를 받는데 하버드에서 나한테 석사학위를 달라. 그랬더니 하버드에서 뭐라 그러냐면 그러면 계절학기를 와서 한 과목을 들으면 석사를 주겠다.

세상에 제가 만약에 나 여기서 박사 받는데 아직 거기 석사 마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학위 달라 그러면 주겠어요? 미친놈이라는 소리나 들었겠지..

왜 이 사람들이 그러면 이런 짓들을 할까?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자기네 출신이 말하자면 한국의 원주민, 교육자로서 활동할 수 있는 선례를 자기들 학교에서 배출한 걸로 하고 싶은 거죠."

결국 조선의 기독교를 확산시키려는 미국 교단의 열망에 힘입어 석사와 박사 학위를 한꺼번에 받는 행운을 얻었던 것이다. 

그 후 이 명문대 학위들은 이승만에게 전지전능한 수호천사가 되주었다. 그가 지지자를 구하면 광적인 추종자들을 모아주었고 그가 출세에 문을 두드리면 그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에피소드 1 하와이언 갱스터 (Hawaiian Gangster)

1913년 이승만은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이때부터 그의 화려한 출세신화가 시작된다. 

하와이로 그를 부른 건 친형제나 다름없던 박용만이었다. 박용만은 무장투쟁만이 조국을 독립시킬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진 레지스탕스였다. 그는 미국의 네브래스카 대학을 마친 후 하와이에서 독립군 부대를 만들고 사관학교를 설립했다. 

이에 반해 이승만은 교민들에 대한 교육사업을 진행했다. 그런데, 이승만이 하는 교육의 내용은 다른 독립운동가들이 가르치는 것과 전혀 달랐다. 그가 호놀룰루 신문에 쓴 글이다.


이승만 박사는 한인 학교에서 "반일사상"을 가르친다는 것을 부인했다.

"우리 학교에서는 일본을 비판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나는 반일감정을 일으킬 생각이 없다.
일본 신문들은 나에 대해 오해를 하지 말길 바란다. 오해는 빨리 풀수록 좋다." 

- 이승만, 하와이 신문


오히려 이승만은 일본에 대해 아주 우호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하와이에 오기 직전 미국 워싱턴포스트와의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한일합방 후 3년도 지나기 전에  한국은 낡은 인습이 지배하는 느림보 나라에서 활발하고 떠들썩한 산업경제의 한 중심으로 변모했다."

- 이승만, 워싱턴포스트 기자회견 중

놀랍게도 이승만의 말은 일본의 '식민지 근대화론' 과 똑같다. 아니 미국 신문에다가 일본의 식민지배가 한국을 발전시켰다고 말하면 미국인들이 한국의 독립을 응원해 줄 이유가 있나? 이 사건만 본다면 그는 한국이 독립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선전하고 다니는 악질 친일파다.

그럼 대체 이승만의 정체가 뭘까?


서중석 교수 <성균관대 사학과> 인터뷰
"초기에 그분이 친일적인 걸로 보인 활동을 하는 건 그 당시 미국의 주류적인 분위기가 친일적인 분위기, 러시아를 막기 위해선 일본을 키워야 한다는 그런 분위기가 강했기 때문이지요. 

그 분은 미국의 주류적인 입장을 항상 반영하는 것이 자신을 위하는 길이고, 자신의 권력에 접근하는 길이고..

그래서 미국을 이끌어가는 세력이라고 이승만이 파악했던 힘을 가진 세력들이 친일성향을 보이면 거기에 자신의 생각을 맞춰나가는 그런 게 상당히 강했어요."

그는 아주 비상한 사람이다. 미국과 일본이 관계가 좋을 때는 일본의 조선지배를 극찬하면서 미국인들의 비위를 맞췄다. 그러나 한국인들과 있을 때는 반일의식이 강한 교육자로 변신했다. 그런 이중플레이를 통해 그는 하와이 한인사회의 지도자로 급부상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중적인 태도인데도 이 사람은 어떻게 계속 지도자가 될 수 있었을까? 이게 어떻게 가능했나요?


정병준 교수 <이화여대 인문과학부> 인터뷰
"하와이 한인이민이라고 하는 1902년에 이민을 시작하면서 시작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 하와이에서는 노동하는 일을 했습니다. 
영어도 잘 못했고 학력도 없고 미국에서 멸시받는 존재였지만 이승만은 미국 아이비리그 박사였고 YMCA를 비롯한 하와이 기독교 교계에서 존경할 만한 그런 지위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이승만은 자신을 안중근 같은 독립투사로 보이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했다.

그는 습관처럼 손끝에다 입김을 부는 괴상한 행동까지 했다. 
한인들이 궁금해하면, "내가 일본감옥에서 고문을 당해 아직도 손끝이 시리다". 라고 설명했다.

주진오 교수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인터뷰
"이승만은 일본에 의해서 감옥에 갈 이유가 전혀 없었죠. 
사실은 뭐 일본이 이승만을 박해해야 될 이유는 전혀 없었어요."

서중석 교수 <성균관대 사학과> 인터뷰
"사실은 이분은 일제 때 한국에 들어온 것은 기독교 관계를 잠깐 일제의 강제병합 직후에 잠깐 들어왔다 나간 것 빼고는 없고, 감옥소 살이한 것은 고종황제 때 감옥소 살이한 거가 있는 거 빼고는 없어요."

주진오 교수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인터뷰
"어떻게 보면 하나의 그 영웅.. 역전의 용사.. 일본의 고문을 이겨 낸.. 그런 어떠한 독립투사로 자기를 이미지메이킹 하려고 하는 하나의 시도였고 거짓말이었다고 얘기할 수 있죠."


그러나 순진한 한인들에게는 아주 잘 먹혔다. 
열성적인 지지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그러자 이승만은 소박하게도 그들에게 딱 한 가지만 요구했다.

찰스 정, 하와이 교민 인터뷰
"그때 이 박사가 이런 말을 했어. 만약 나의 사제가 되기를 원한다면 맹목적으로 나를 따르라."

"맹목적으로 나를 따르라." 
대체 이승만은 무슨 일을 하려고 이렇게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추종자들을 원했던 걸까.

이승만의 첫 번째 목표는 박용만을 지지하는 '하와이 국민회'를 장악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 한인들은 정기적으로 독립운동 성금을 냈고 이로 인해 국민회는 미주 지역 최대의 독립자금 조달처였다. 이 사실을 잘 아는 이승만은 자신의 추종자들을 이끌고 국민회를 장악하기 위해 싸웠다.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는 테러도 불사했다.

미니 유, 하와이 교민 인터뷰


이승만이 당신 아버지를 죽이려 했다는 걸 어떻게 아셨죠?
"어느 날 우리 아버지가 농장에서 일하고 있을 때 누군가 등 뒤에서 무기를 들고 다가왔어. 곡괭이.
곡괭이로 등을 찍었어. 그래서 아버지는 병원에 가야했지."
이승만이 한 짓인가요?
"이승만의 폭력단 조직원이 저지른 거야."



에드워드 김, 하와이 교민 인터뷰
"이승만은 조직의 대표 자리와 통제권을 넘기라고 했어.
왜냐면 자기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안정적인 돈이 국민회로 들어오거든. 이승만은 자신의 조직원들을 전부 데려왔어. 그래서 엄청 큰 싸움이 벌어졌어. 총까지 쏴대고.."

이승만, 그는 사이비 기독교인이었던 모양이다. 사랑을 실천하라는 예수님 말씀을 어기고 피튀기는 테러까지 동원하며 국민회를 장악했다. 그리고 '네 이웃의 소유물을 탐하지 말라'는 십계명도 어기며 현란한 부동산 재테크에 착수했다.

1914년 7월 14일, 이승만은 한인들이 모아준 여학생 기숙사 건립기금 2400달러로 부동산을 구입했다. 그런데 바로 그 날, 이승만은 자신에게 땅을 판 프레드 베링거에게 그 땅을 담보로 1400달러를 빌렸다. 조건은 1년 내 상환 이자는 연리 8% 였다. 그런데 1년 후 베링거가 빚을 갚으라고 하자 이승만은 자기 빚을 국민회더러 갚으라고 떠넘겨버렸다.


그리고 점점 더 대담해졌다. 그는 국민회의 재산인 여학교도 단돈 1달러에 인수했다. 그 후로도 그는 이런 짓들을 계속 반복했다. 국민회 재산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돈을 챙기고 마지막에는 자기 소유로 만든 국민회 재산들을 전부 매각해서 목돈을 챙겼다. 이것이 하와이 갱스터의 재테크 비결이다. 그런데 이런 짓을 하면 결국 감옥에 가지 않나?

김희수 변호사, <형사소송 전문> 인터뷰
"당연히 감옥 갈 범죄행위죠..ㅎㅎ 법원에서 재판을 한다고 그래도 정당히 굉장히 나쁜 범죄.. 죄질이 우리가 흔히 쓰는 말로 죄질이 굉장히 나쁜 범죄행위죠.. 

왜냐면 굉장히 어렵고 힘들게 같이 고난을 당하면서도 어떤 민족의 독립운동을 위해서 모아놓은 돈의 성격이기 때문에 독립운동을 빙자한 횡령 범죄행위다. 라는 것이고 그러한 행위를 현재의 법률적 잣대로 들여다 본다면 징역 7년 이하에 처해지는 범죄행위죠."



에피소드 2 악의 탄생 (The Rise of Evil)

그러나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다. 이승만이 장악한 국민회의 공금집행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회계처리가 엉터리라는 물증까지 확보하고 이승만 세력에 퇴진을 요구했다. 물론 이승만은 가만두지 않았다. 추종자들을 동원해 물증을 빼앗고 입을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폭력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진짜 심각한 상황이었다. 만약 모든 비리가 탄로나면 이승만은 끝장이 난다.

물론 그는 머리가 아주 비상하다. 그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할 기상천외할 해결책을 찾아냈다. 먼저 이승만은 재정문제를 제기한 국민회 대의원들을 경찰에 고발했다. 폭동이나 소요를 일으킬 수 있는 위험인물로 고발한 것이다. 

그리고 1918년 2월 27일 재판이 시작되면서 이승만은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짓까지 저질렀다. 그는 법정에 증인으로 나와 미국 판사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판사님, 이들은 박용만 패당이며 미국 영토에 한국인 군대를 만들었습니다. 

이들은 위험한 반일행동을 하며 일본군함 이즈모가 호놀룰루에 도착하면 파괴하려는 음모까지 꾸민 무리들입니다. 이것은 미국과 일본 사이에 중대한 사건을 일으켜 평화를 방해하려는 것입니다. 판사님 저들을 조처해 주십시오."     - 이승만, 하와이 법원 증언



믿기 힘들겠지만 이건 실화다. 실제로 그는 이런 증언을 했다. 
그런데 이승만의 증언은 자신의 조국에 대한 명백한 반역행위 아닌가?

실방 레미, <파리1대학 박사과정> 인터뷰
"프랑스인의 관점에서 본다면 동포들이 배신감을 느꼈을 것 같다. 그들은 타국에서 조국을 돕고자 했으니까. 따라서 이 사건을 반역 행위로 봤을 것이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2차 대전 때 프랑스인이 외국 언론과 인터뷰를 하면서 독일의 프랑스 점령이 프랑스에 이익이 됐다 그런 말을 했다면 2차 대전이 끝난 후에 공식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그를 반역자로 여겼을 것이다."


만약 이승만이 프랑스 사람이었다면 1944년 프랑스가 나치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그는 프랑스 법정에 세워졌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변명을 하며 선처를 호소했더라도 이승만은 A급 반역자로 판결을 받고 사형을 받았을 것이다.



에피소드 3 똑바로 뽑아라 (Choose a Righteous Man)

1919년 아일랜드 독립전쟁이 벌어졌다. 아일랜드는 300년 동안이나 영국의 식민지였다. 그런데도 민족성은 잃지 않고 독립을 얻기 위해 영국에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그 해 3월, 한국에서도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무려 200 만명이나 참가한 거대한 항쟁이었다. 하지만 일본은 무자비하게 진압했고 결국 수많은 사람들이 투옥되고 처형됐다.

그러나 조선인들의 독립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홍범도 같은 무장투쟁의 지도자들은 독립군 부대를 이끌고 국내로 진격하며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이 때 저명한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상해에 모여 임시정부 수립을 준비했다.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헌법을 만들고, 그리고 독립운동의 최고지도자를 선출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런데 다수의 독립운동가들이 최고의 지도자로 이승만을 추천했다. 왜 이런 어이없는 일이 벌어진 걸까?

서중석 교수 <성균관대 사학과> 인터뷰
"그 임시정부 구성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이 국내 기호파 개신교라고 얘기할 수 있을 거에요.
 (기호파 개신교 세력 : 황해도, 경기지역 출신 기독교인)

자기들이 볼 때에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고 또 자기들과 교분이 가까운 그런 대표적인 사람이 누구냐? 이승만을 쉽게 꼽을 수가 있었죠."




안타깝게도 그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았다. 
지도자가 될 사람을 제대로 검증하지 않고, 기왕이면 같은 지역 출신. 기왕이면 같은 종교를 믿는 사람. 그리고 기왕이면 학벌이 높은 사람이 지도자가 되길 원했다. 
그래서 결국 돈과 출세를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 된 것이다.

하와이 갱단 보스에서 순식간에 대통령이 된 이승만. 
그는 역시 제일 먼저 임시정부의 돈줄부터 장악하려고 했다. 


워싱턴에 구미위원부를 설립하고 독립운동에 쓰겠다며 국채를 발행해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목표액은 5백만 달러, 하와이때보다 스케일이 엄청 커졌다. 그런데 큰 장애물이 있었다. 임시정부가 이미 독립운동 성금을 모으고 있었던 것이다. 이승만은 즉시 모금을 중단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하와이 깡패 본색을 드러내며 정부에서 걷은 돈도 전부 넘기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기호파 세력이 아닌 정부요인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그리고 한인들이 내는 성금으로 국내 비밀조직을 확대하고 만주의 독립군 부대들을 통합하며 본격적인 독립전쟁 준비에 착수했다. 게다가 놀랍게도 캘리포니아에 비행학교를 세워 공군창설까지 추진했다. 


"우리는 태평양을 날아가 쥐 같은 왜왕의 머리를 부수고 싶다."

그러나 이승만은 집요했다. 상해에 파견한 자신의 심복 안현경을 통해 기호파 세력을 움직이며 재정권 장악을 추진했다. 1920년 3월 결국 독립성금을 둘러싼 갈등은 이승만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자 임시정부는 내분에 휩싸였다. 

각부 차장들 집단사직 결의 < 구미위원부 폐지, 이승만 사퇴 요구 >

서중석 교수 <성균관대 사학과> 인터뷰
"모든 충돌을 보면은, 돈과 관련이 있어요. 
이승만과 관련된 수많은 충돌을 보면은 다 돈과 관련이 있습니다."

정병준 교수 <이화여대 인문과학부> 인터뷰
"그것은 이승만의 본능이나 본성에 가까운 행동이었다라고 생각이 듭니다."

임시정부의 돈줄을 장악한 이박사. 그는 신이 나서 미국 대륙을 돌아다니며 대대적인 모금 활동을 벌였다. 
이승만에게는 정말, 찬란한 봄날이었다. 

나이 마흔 여섯에 자신을 숭배하는 스물 두살자리 여대생과 여행도 하고 틈만 나면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최고급 럭셔리 호텔에서 잠을 잤다. 
그런데 1920년 6월 샌프란시스코에서 덜컥 미국 수사관들에게 잡혔다. 

<MANN ACT 맨 법률 위반


당시 미국은 청교도적인 분위기가 강했다. 그래서 부도덕한 성관계를 목적으로 주 경계선을 넘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다. "믿어주세요. 우리는 아빠와 딸 같은 관계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수사관들은 집중 조사를 벌였다. 그러자 이승만의 감추고 싶은 비밀까지 드러났다. 이승만이 백인 여자들에게도 접근해 마치 재벌 2세처럼 최고급 식사를 사주며 데이트를 즐겼던 것이다. 결국 미국 수사관들은 이승만을 부도덕한 플레이보이라고 판단했던지 그를 기소해버렸다.

사태는 심각했다. 만약 이 사건이 등골이 휘도록 일해서 독립성금을 내주는 한인들에게 알려지면 일단 개망신은 기본이고 다시는 이승만에게 땡전 한 푼 줄 리가 없다. 그는 조심스럽게 해결책을 강구했다.

일단 대통령 환영회에 불참을 통보하고 그 이유는 비밀이라고 둘러댔다. 그리고 재판은 하와이에서 받게 해 달라고 사정했다. 호놀룰루에 도착하자 이승만은 비밀리에 백인 유력인사들과 접촉했다. 이승만과 오랫동안 관계를 맺어왔던 백인들, 그들은 '이박사는 절대 그럴 분이 아니다' 라고 보증을 해주었고 결국 그는 위기상황에서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다. 그제서야 이승만은 대통령이 된 지 1년 만에 상해로 갈 준비를 시작했다.



에피소드 4 상해의 결투 (Fight in Shanghai)

이 때, 일본은 만주 일대의 독립군을 초토화 시키겠다고 대규모 병력을 출병시켰다. 그러자 홍범도와 김좌진은 부대를 이끌고 청산리 일대에 집결했다. 죽음을 각오한 3천여 명의 독립군들. 그들은 3만 5천 명의 일본군에 맞서 6일간의 대 격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독립군은 일본군을 완벽하게 박살내는 기적을 만들어 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며 세계를 놀라게 했던 일본. 그런 일본이 의병과 다름없는 조선인 독립군들에게 대패하면서 처음으로 치욕적인 패배를 맛보았던 것이다. 그러자 일본군은 조선인 민가들을 습격하며 소름끼치는 대학살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상해임시정부는 발칵 뒤집혔다. 강경파들은 당장 중국과 연합해 게릴라전을 벌이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온건파들은 군사력을 제대로 키워서 전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로 이런 중요한 시점에 이승만이 상해로 왔다. 일단 모두가 환영을 해주었다. 독립성금 문제로 이승만을 비판했던 사람들도 환영회에 참석했다. 그리고 행사가 끝나자 임정요인들은 일본에 맞서 효과적인 독립운동을 벌이자며 정부 개혁방안들을 건의했다.

"대통령은 정부에서 근무해야 효율적이다. 그게 힘들면 국무회의에 권한을 위임해달라."

하지만은 이승만은 모조리 거부했다.

"나는 미국에 있을 것이고 어떤 권한도 넘겨줄 수 없다."

결국 정부요인들은 폭발직전에 이르렀다. 그러자 이승만은 전격적으로 대통령 교서를 발표했다. 그런데 거기엔 아주 획기적인 이승만의 독립운동 전략이 담겨 있었다.


"우리 형편 상 전쟁준비는 국민들에게 맡기는 것이 옳다. 
국내외 일반 국민들은 각자 직업에 종사하면서 여가시간에 병법을 연마하라. 
무기도 각자 구하라.
그러다 좋은 시기가 오면 일제히 나서 싸우자."

독립운동가들은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대체 이승만은 왜 이런 돌대가리같은 전략을 내놓은 걸까? 
그 이유는 역시 돈과 관련이 있다. 임시정부 수립 후 한인들은 독립성금을 냈고 정부는 예산을 편성해서 독립군 부대를 양성했다. 그런데 이승만이 끼어들어 브로커 역할을 했다. 성금을 받아서 성과도 못내는 외교활동을 내세우며 13%만 송금한 것이다. 

그런데 독립전쟁 준비를 국민들에게 떠넘기면 어떻게 될까? 이승만으로서는 정부에 보내야 할 돈을 더 파격적으로 줄일 수 있다. 바로 이게 핵심이다.



드디어 독립운동가들도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대통령이란 자가 독립성금이나 눈독들이고. 정부역할이 중요한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도 허무맹랑한 전략이나 지껄이면서 아무런 비전도 내놓지 못하니 임정요인들 사이에서 '이대로는 안된다!' 그런 매우 건설적인 공감대가 확산됐다.

마침내 정부 핵심요인들은 이승만에게 물러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그가 누군가? 돈과 출세에 청춘을 바친 이승만이다. 결국 상황은 파국으로 치달았다. 

이동휘 "저런 썩은 대가리와 함께 일할 수 없다."
김규식 "말이 되는 대책이 있어야 참여해서 돕지 시간만 낭비하기 싫다."
안창호 "당신이 사퇴해야만 독립운동 세력이 통합된다."

국무총리(이동휘)가 이미 떠난 상황에서 김규식 그리고 안창호마저 임정을 떠났다. 
위기탈출의 귀재 이승만. 과연 그는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했을까?

"긴급한 외교사명이 있어 미국에 간다."

그렇게 임시정부를 쑥밭으로 만들어 놓고 이승만은 백인 미녀들과 럭셔리 레스토랑이 있는 미국으로 돌아가버렸다.



에피소드 5 우리는 혁명을 꿈꾼다 (We dream about A Revolution)

1924년 상해에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임정을 개혁하려는 독립운동가들이 의정원(대한민국 임시정부 입법부)의 실권을 장악한 것이다. 그들은 독립운동에 아무 도움이 안 되는 이승만의 대통령 권한부터 정지시켰다. 미국에서 이 소식을 들은 이승만, 그는 곧바로 하와이 깡패본색을 드러냈다.

"지금부터 임시정부에 인구세를 보내지 마라."


독립운동의 자금줄을 완전히 끊어버린 것이다. 이승만 스고이~

악질 친일파를 능가하는 이승만의 행동에 임시정부는 즉시 칼을 빼들었다.  

< 이승만 탄핵 >


서중석 교수 <성균관대 사학과> 인터뷰
"이승만을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탄핵하려는 움직임이 있을 때에 이승만쪽에서는 거기에 미주지방 동포들이 걷어준 돈을 끊어버리거나 그렇게 나오는 걸 볼 수가 있어요. 

다시 말해 돈을 가진 자가 정치권력에서 헤게모니를 쥘 수 있다라는 역시 이승만다운 발상이라고 할 지는 모르겠습니다만은.."

그 뒤 임정은 새출발을 하려고 했지만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잠은 청사에서 자고 밥은 동포들에게 빌어먹는 상황이다."




이 때,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던 한 남자가 임시정부의 새로운 지도자로 떠올랐다. 나라를 잃은 분한 마음에 일본 첩자를 맨주먹으로 때려 잡았던 터프한 남자. 그리고 조국이 독립할 수만 있다면 임정의 문지기가 되도 좋다는 순정파 로맨티스트. 그는 열혈민족주의자 김구였다. 역시 진짜 독립운동가는 이승만과 달랐다.

허무맹랑하고 비현실적인 말은 전혀 하지 않았다.

미국 대통령이 반드시 한국 문제를 처리해 줄 것이다." - 이승만


< 미국과 영국, 일본의 한국 지배를 동의 >, 워싱턴 군축회의 1921

이 냉정한 국제관계를 정확히 직시했고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김구의 임시정부는 눈물겹도록 현실적인 독립운동 전략을 세웠다. 


"미약하더라도 우리가 일본과 직접 싸워야 한다. 그래야만 일본의 적대국들이 한국을 주목한다."

그리고 곧바로 구체적인 공격계획을 수립했다. 상해 일본군 사령부, 국내 조선총독부, 만주 관동청, 그리고 도쿄의 일본 천황까지 직접 타격하는 목표를 설정했다. 이를 위해 김구는 특무조직, 한인애국단을 조직했다. 그리고 1932년부터 실행에 들어갔다.




<천황에게 폭탄투척>, 1932년 1월 8일



그러나 목표달성은 쉽지 않았다. 그 때에 운명처럼 김구를 찾아온 청년이 있었다. 그는 농민들을 가르친 계몽운동가였고 두 아이의 아버지였다.



<일본군 전승축하기념식>, 1932년 4월 29일






나도 알고 있다.
일본 장교 몇 명 죽인다고
독립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목숨을 바친다

자유의 세상은 우리가 찾는다
나의 자유, 민중의 자유

개인의 자유는 민중의 자유에서 나아진다.

- 윤봉길



이 소식은 하와이에도 알려졌다. 그러자 이승만은 김구에게 주제넘은 충고를 했다. 


"어리석은 짓들 좀 작작해라. 독립운동에 하등 도움이 안 된다."

그러나 윤봉길의 희생은 어리석은 짓이 아니었다.


"중국의 30만 대군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한국인 한 사람이 해냈다." - 장제스 총통


그리고 장제스 총통은 한국의 레지스탕스들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다. 



<한국 광복군 창설>, 1940년 9월

드디어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의 새로운 활로를 개척한 것이다. 




<태평양 전쟁>, 1941년 12월 8일

"미합중국은 갑작스럽고 계획적인 공격을 받았습니다. 
정의로운 힘을 가진 미국인들은 압도적인 승리를 할 것입니다." -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


일본과 미국이 친할 때에는 외교 노선이 제일이라던 이승만, 이제 일본이 미국의 적이 되자 화려한 변신을 했다.

"나는 이승만입니다. 미국 워싱턴에서 우리 2천 3백만 동포에게 말합니다. 
분투하라! 싸워라! 우리가 피를 흘려야.." - 이승만 

일본의 식민지배가 조선을 발전시킨다고 극찬했던 이승만. 그런 그가 감쪽같이 반일항전의 투사로 변신한 것이다. 그리고 미국의 유력자들과 접촉하며 다시 최고권력자가 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때, 임시정부는 연합국의 일원으로 대일전에 참전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영국군에 광복군 파견>, 1934년 8월

그런데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미국의 전략첩보국이 한국인들을 대일전에 활용하는 전략을 세운 것이다.



To use Koreans against Japen
in Korea and Japan 
한국인들을 한국과 일본에
침투시켜 대일전에 활용한다   - 미국 전략첩보국



OSS는 먼저 이승만과 접촉했는데 그가 OSS와의 관계를 대외선전용으로 이용한다고 판단하고 관계를 끊어버렸다. 그리고 임시정부의 광복군에 직접 손을 내밀었다.



<도쿄 대공습>, 1945년 3월 9일





1945년 5월, 마침내 임시정부는 OSS와 한미공동작전에 합의했다. 
이것이 국내진공작전이라 불리는 이글 프로젝트(EAGLE PROJECT)였다.




힘든 훈련을 받으면서도 광복군 병사들은 가슴이 벅찼다. 만약 광복군이 국내로 들어가 직접 일본군을 몰아낸다면 임시정부가 한국의 독립에 대해 당당하게 발언할 권리를 얻기 때문이다. 그렇게만 되면 독립운동가들이 구상해 온 국가를 세울 수 있게 된다. 그것은 NEW DEMOCRACY 새로운 민주주의 국가였다.



이만열 교수 <전 국사편찬위원장> 인터뷰
"인민의 자유와 인민의 권리를 최대한 보장하는 것이다. 
그럼 자유만 가지고 나라를 우리가 앞으로 나라를 다스릴 거냐? 그렇지 않다.. 
약자를 보호할 수 있는 최소한의 사회경제적 그런 합의도 건국강령속에 넣어야 한다.."



한국의 레지스탕스들이 꿈꾸던 나라, 그것은 지금의 프랑스나 영국같은 유럽국가 들과 가장 비슷하다.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면서 국민들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는 공공분야는 국가가 관리하는 것이다. 특히 교육은 프랑스처럼 대학 등록금까지 무료로 해서 서민들을 보호하는 것이다.


서중석 교수 <성균관대 사학과> 인터뷰
"독립운동하는 사람들은 1945년까지 그 당시 사료를 보면은, 자신들을 전부 혁명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전의 사회와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를 만들겠다. 자유로운 사회, 평등한 사회, 착취가 없는 사회, 억압이 없는 사회, 그건 민주공화국이다." 



1945년 7월, 임시정부의 활발한 움직임에 이승만은 초조해졌다. 그는 상황을 역전시킬 승부수를 찾았다. 
연합군 총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 그는 미국 대통령도 함부로 할 수 없는 태평양의 황제였다. 일본이 항복하면 한국 문제의 실권도 그가 쥐게된다. 결국 맥아더의 선택을 받는 자가 한국의 최고권력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그는 소련을 싫어하는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 이승만은 맥아더를 공략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미친듯이 러브레터를 쓰기 시작했다.


저희는 대일전에 꼭 참전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나쁜 소련의 방해로 좌절됐어요." - 이승만

물론 소련은 방해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승만은 그분의 사랑을 얻기 위해 거짓말을 좀 섞었다.
그러자 3일 후, 그분에게서 답장이 왔다.


"Splendid Spirit. 이 박사의 숭고한 정신에 깊은 감명을 받았소." - 더글라스 맥아더

아, 이게 현실일까? 이승만은 꿈꾼 기분이었다. 


원자폭탄을 맞자 일본은 예상보다 빨리 항복을 선언했다. 

<일본 패전>, 1945년 8월 15일

이것은 독립운동가들에게 비극적인 소식이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하다. 천신만고로 참전 준비를 한 것이 다 허사가 되었다."

김구는 조국의 미래를 걱정했다. 대일전에 참전을 못했으니 한국인들이 당당하게 독립을 주장할 권리를 얻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제 강대국들은 한반도를 자기들 마음대로 이용하려 들 것이다. 

최악의 경우 미국과 소련의 꼭두각시가 되어 대리전쟁을 치뤄야 할 지도 모른다. 독립운동가들은 태극기를 들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마음속으론 비통함으로 울고 있었다.




그러나 이 때, 이승만은 웃고 있었다. 그는 신이 나서, 맥아더를 향해 더욱 노골적인 구애를 펼쳤다. 


"미국이 단독으로 한국을 점령해주세요. 전 소련이 싫어요."

그리고 이승만은 맥아더와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를 만나면 이승만이 할 말은 뻔했다.

"제가 마음에 드시면 
저를 한국 대통령으로 만들어 주십시오."

이 때, 맥아더는 도쿄에서 일본 문제를 처리하느라 바빴다. 연합국들은 침략전쟁의 책임자들을 처벌하라고 요구했다. 히로히토, 그는 전범재판에 회부돼 사형을 받을까봐 잠도 제대로 못 자는 상태였다. 9월 27일, 히로히토는 조용히 맥아더를 찾아갔다.

그리고 정치적 거래를 시도했다.

저를 살려주시고 천황제를 유지시켜 주십시오. 
미국이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맥아더는 어떠한 결정을 내렸을까? 정의의 이름으로 다른 나라를 침략한 히로히토를 처벌했을까? 
아니면 미국의 국익을 확대하려고 정치적 거래를 수락했을까?


그는 자신의 조국을 위해 삶을 바쳐 온 애국자다. 맥아더는 히로히토를 전범재판에 회부하지 않았다. 그 댓가로 미국은 일본에 미군을 계속 주둔시킬 수 있는 권리와 동북아에 교두보를 확보했다. 이제 다음 차례는 한반도 문제였다.

미국의 영웅 맥아더, 그는 어떠한 사람을 한국의 대통령으로 세우고 싶었을까? 맥아더 자신처럼 자기 나라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애국자였을까? 물론 그럴리가 없다. 맥아더는 미국의 국익을 최대한 보장해주는 인물을 원했다.

1945년 10월 13일 이승만은 도쿄로 향했다. 이제 한국의 미래가 결정될 운명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백년전쟁 1부 THE END> 
민족문제연구소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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