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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정치

'항왜 장수 사야가(沙也可), 그는 김충선이 되어 우리나라를 지켰다.

by InvestorX 2012. 12. 31.


임진왜란 때, 항왜라고 하여 왜군 중에 조선군으로 투항한 이들이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무려 1만여 명의 일본군이 조선에 투항을 해왔다고 하는데 초기에는 그들을 모두 참수했다고 하나 나중에는 '항왜'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받아주었다고 한다.



그들 중 대표적인 사람이 사야가(沙也可)라는 장수로 가토 기요마사 군의 선봉장이었다. 그는 상륙 일주일만에 “이 나라의 예의문물과 의관 풍속을 아름답게 여겨 예의의 나라에서 성언의 백성이 되고자 할 따름입니다.” 는 말로 귀순의사를 밝힌다. 


김해 김씨를 하사받은 그는 경상도의 의병들과 함께 힘을 합쳐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고 곽재우와 연합하기도 했다. 의병 및 조선군 장수로서 모두 78회의 전투를 벌였으며 이때 전공을 세워 후에 '자헌대부' 벼슬까지 올라 장관정도 까지 올라갔다.  


이 뿐 아니라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의령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울산성 전투에서 가토의 1군을 섬멸하는 공을 세웠다. 이괄의 난 때는 이괄의 부장 서아지를 포참하기도 하며 병차호란 때는 소명을 받지 않고 청나라 병사 500명을 베기도 했다. 


그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보급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조총을 자체 개발하여 조총 부대를 만들었던 인물이다. 일본에서 철포 부대(일본의 조총 부대를 일컫는 이름)의 지휘자였었다 조선에 철포 기술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이는 후에 조선군의 조총개발과 생산에 기여를 하였는데 그 영향으로 조선군의 전통적인 활을 중심으로 하는 전술에서 후에 검과 조총이 중심이 되는 것으로 변했을 정도다. 


일본군의 조총을 완전히 모방한 것은 아니고 조선군의 개인화기들을 개량한 수준이라고 한다. 또한 이순신의 진영에서는 사야가의 도움으로 조선의 개인화기의 장점과 조총의 장점을 섞은 조선형 조총을 개발하기도 하였다.


또한 조선 최강의 살수집단이 항왜라고 불릴 정도로 백병전에 능했는데 선조는 어린아이를 뽑아 왜검술을 익혀 나라를 지킬 무사로 키우려고 할 정도였다. 


전쟁이 끝난 후 항왜가 부담스러운 존재로 바뀐 조선정부에서는 이들의 대접을 점차 소홀히 하였다. 그들의 검술과 조총기술 등은 잘 활용되지도 않고 묻힌 셈이 크다.  


독립운동가나 외적에 맞서서 싸운 이들에 대해서 상을 내리거나 포섭하려는 노력도 없어 보이며 '항왜'같은 도움을 주는 사람들조차도 의심하고 멀리하려했던 우리의 역사. 친일의 역사를 바로 잡기 위해서 우리가 다시 기억해야 하는 인물 그는 바로 '김충선'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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